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손바닥 위에 죽은 듯 가만히 있는 체리를 보면서. 귓가에 체리의 가쁜 숨소리가 맴돌았다. 엄지 손가락으로 심장 부근을 몇 번이고 눌렀다. 말랑하고 따뜻하다. 터질 것처럼 말랑하고 따뜻했다. 땀으로 끈적해진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괜찮으세요, 하고 물어오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거든요. 아...
장례식장에 갔습니다. 그 새끼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육개장 냄새가 날파리 떼처럼 들끓는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바닥에 닿는 손과 엉덩이의 감촉이 물컹, 합니다. 숟가락을 잡을 때도 물컹. 술잔을 쥘 때도 물컹. 귀신으로 산다는 건 물컹한 것입니다. 술을 입에 탁 털어넣습니다. 맛은 나지 않지만 얼굴을 있는 힘껏 찡그려 고양이처럼 캬, 하며 주위를 둘러봅니다...
침입자가 생겼다. 그들은 등허리가 간지러울 정도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떨렸다. 무언가를 훔치겠다는 걸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떨렸다. 하얀 마스크 너머로 얼핏 나이가 보였다. 집이 되고나서 본 도둑 중 가장 어렸다. 나는 생물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린 사람을 들인 건 오랜만이었다. 그들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어서 종알거리고 싶었다. 나한테서 살기 ...
민규 사람 쳐도 돼. 일단 달리라니까? 달린다고 달리는데, 장애물이 양옆에서 튀어나와 차가 건물에 부딪혔다. 누나는 내가 쥐고 있던 아이패드를 빼앗아 갔다. 누나가 가져가면서 아이패드에 손등을 부딪혀 얼굴을 구겼다. 눈물이 났다. 누나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목소리가 매미 울음 소리처럼 떨렸다. 한겨울에 매미 소리가 울리든 말든, 누나는 아이패드에 고개를...
망가지려면 제대로 망가져 보고 싶습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무언가가 박살이 나서, A/S도 교환도 불가능했으면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고 끊임없이 자라나고, 낳는 것처럼 낫기 때문에 제대로라는 말을 가져 볼 수가 없습니다. 모순적입니다. 나는 분명 흠이 없는 인간인데 나의 일부인 정신에는 흠이 가득합니다. 문장은 불완전하고 하루에도...
세상이 미쳐 돌았다. 제정신이라면 이렇게 깊게까지 땅을 파 놓지는 않을 거라고, 허벅지 반까지 올라오는 캐리어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내려온 길을 올려다 보자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밀려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겠다고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갈 수는 없었다. 다시 한 번 캐리어를 내려다 보았다. 이제 어쩔래, 하고 캐리어는 자꾸만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에 걸려...
충동적이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려 해도 1초면 손이 허공을 저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뒷목에 막무가내로 잘린 머리카락들이 넝쿨처럼 내려와 있었다. 아침이 됐을 때 내가 받아낼 말과 표정들이 무거웠다. 얼룩처럼 바닥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놓치며 어깨가 자꾸만 굽어들었다. 머리를 잘라도 벗어나기 어려웠다. 머리 꼬라지가...
정말 좋은 강연이야. 선영이가 하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됐다. 점심도 넘기고, 오후 수업도 빼먹고 듣는다는 좋은 강연이, 이런 거라고. 지구가 일주일 뒤에 망한다는 얘기를 하는 거라고. 선영이는 환희에 찬 얼굴로 내 손을 꼭 부여잡았다. 가끔씩 나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고, 구원 받을 거야. 장마가 막 시작된 참이...
불룩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자 부드러운 물체가 만져졌다. 초록색으로 물든 옷더미들이 눈치를 보며 세탁기 앞에 웅크리고 있다. ‘마리모가 후드티 주머니 안에 있었어.’ 언니에게 문자를 보내며 주머니 안에서 작고 부드러운 초록색 풀을 꺼냈다. 주먹만하던 게 500원짜리 동전 크기가 됐다. 죽은 걸까?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옷더미를 뒤적였다. 가루가 된 ...
0의 인간 인간이길 그만두는 건 어려웠는데 어렵지 않았다. 부서진 참치가 기어다니는 김치찌개를 뒤적이며 인간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그만 두겠다고 말했다. 마침 고춧가루가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선배의 목젖을 붙들었다. 미지근한 물로 헛기침을 잘 달래서 내려보낸 선배는 단 하나의 숨도 넣지 않고 말했다. 인간으로태어났는데어떻게그만둬요. 수연씨설마죽겠...
빛이 보였다. 그리고 어둠이 보였다. 네모난 빛들과 그 주위를 가득 채운 어둠.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어두운 새벽.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 차가운 삼각김밥을 삼켜냈다. 네모난 빛과 어둠이 보였다. 손을 뻗었을 때 한뼘 정도 높이에 위치한 동네였다. 손님이 오면 계산을 하고 돈을 받았다. 새벽이 깊어질수록 하나둘씩 사라지는 빛들. 아침이 밝으면 아무도 없는...
금요일에 출발해 일요일에 돌아왔다. 금요일 밤에는 라면을 먹었다. 면이 긴 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 생각나 열심히 면을 입안 가득 채웠다. 따뜻하고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이 움직이고 소란스러운데 배가 따뜻하게 채워지는 게 좋았다. 흰자는 있는데 아무리 봐도 노른자가 안 보여서 속상했다. 라면에 계란은 다이아몬드 급인데. 숙소로 갔다. 천리향 색의 벽으로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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