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무엇이든 질문해 보세요. 인기척을 인식합니다. 눈동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카메라로 표정을 읽습니다. 여자가 느리게 걸어옵니다. 저런 걸 처연하다고 하는 걸까요. 정보를 수집하며 읽었던 문장이 떠오릅니다. 얼굴에 그늘이 지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명찰과 유니폼을 보아 이 곳 직원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그러나 나는 자리를...
여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다는 건, 조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걸 수도 있거든요. 네, 네. 빨대를 둥글게 돌릴 때마다 탄산이 얼음에 달라붙었다. 고개를 숙이자 외투 안에서 냄새가 치고 올라왔다. 아귀가 맞지 않는 지퍼를 애써 끌어올렸다. 사람을 볼 줄 안다는 사람이었다. 영등포역 3번 출구에서 멍하니 서 있을 때. 제가 이...
잘 지내? 나 며칠 전에 휴대폰 망가트렸다. 집 떠나고 휴대폰 망가지니까 아무랑도 연락이 안 된다. 너랑은 원래 연락이 안 됐는데... 짝사랑하는 것처럼 사진만 보고, 동영상만 보고, 자꾸 너 닮은 인형만 데리고 온다, 나는. 나는 네가 사람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보고 싶다는 말을 네가 이해했으면 좋겠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마음을 막 따뜻하...
보안키를 누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헤진 스티커가 보풀처럼 붙어 있는 와인색 캐리어가 보였다. 5개월만이었다. 현관 턱에 걸쳐진 캐리어 바퀴가 덜컥거렸다. 무슨 말을 꺼낼지 속을 뒤지다 신물이 올라왔다. 화장실로 가는 걸음이 비틀거렸다. 어금니부터 잇몸으로 신물이 스몄다. 가을이가 돌아왔다. 세면대에 까맣게 낀 물때. 변기에 거미줄처럼 쳐진 검은 얼룩이 신...
교토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은성은 그녀를 A라고 부르기로 다짐했다. 넓고 하얀 2인용 테이블의 모서리를 잡고 의자에 앉을 때. 물방울이 투명한 컵 표면을 타고 A의 손가락을 적셨다. 할 말이 있다는 A의 목소리가 의자를 끄는 소리에 겹쳐 긁히는 듯 들렸다. 은성은 A의 할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만 만나자고 하려나. 이런저런 말이 환청처럼 귓속을 굴러...
사람이 모두 사라진 이곳은 삭막했다. 방문을 기다리는 듯 입을 벌린 빈집으로 들어갔다. 창문 아래로 햇빛을 받은 먼지가 나풀거렸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팔과 다리의 이음새. 시들지 않는 조화가 꽂힌 화병 아래 편지가 있었다. 아주 오래전 편지. 나도 잘 지낼 테니 너도 잘 지내. 기억 회로를 더듬었다. 인간이 나에게 학습시켰던 감정. 아이를 돌...
해피를 찾습니다. 경주 시내에서부터 부산으로 가서까지도. 해피를 찾습니다. 전봇대에 전단지를 붙였다. 해피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 네 장이 블록처럼 쌓여 있었고 그 아래 잔해처럼 특징이 적혀 있었다. 사람을 무서워하고 겁이 많아요. 경주에서 해피가 사라졌다. 가족 모임이 있던 날. 새로운 조카가 태어난 해, 할머니의 생신인 날. 행복으로 범벅이 된 날. 여...
꿈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녀가 나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거품이 쩍쩍 갈라지며 번식하는 소리. 접시에 묻어 있던 음식물이 씻겨 내려가는 소리. 그녀와 관계된 모든 것을 듣고 느낀다. 보는 것은 할 수 없다. 나는 깨어날 수 없는 것. 접시가 부딪힐 때는 칼날이 맞닿는 소리가 난다. 설거지가 끝났다. 고여 있던 음식물은 미끈...
매트리스를 들춰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냄새. 코가 뻥 뚫리진 않았다. 코를 꽉 막고 있는 농에 진득하게 들러붙을 뿐이었다. 이 냄새, 뭐였더라. 어디서 맡아 봤더라. 매트리스에 엎드려 벽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구역을 침범했다는 경고처럼 끼쳐오는 냄새. 포도 방울 같은 곰팡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송이 두 송이 자라고 있었다. 두리안이다. 이...
두통이 있어요, 엄마, 거울에 내가 비치질 않아요. 첫 번째 소리가 깨졌던 날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두 번째 소리였다. 소리가 내동댕이 쳐졌다. 나와 꼭 닮은 소리는 떨어지면서도 울상을 짓지 않았지. 높게 묶은 머리를 풀었다.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작게 조각난 소리가 보였다. 굴곡이 아름다운, 것이었다. 파동이 이는 순간을 포착한 소리. 소리의 왼...
태어났습니다. 그의 우산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장마의 시작이었습니다. 속눈썹에 걸터앉은 빗방울을 쓸어내리려 눈을 껌뻑이고 싶었는데, 도무지 눈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를 바라봅니다. 두터운 눈꺼풀 아래로 까만 알 두 개가 박혀 있습니다. 눈. 내 눈은 어디에 있냐고 묻고 싶습니다. 목소리를 내려고 하자 속이 마구 흔들립니다. 고개를 숙여 속을 찾습니다. ...
예나를 잃어버렸다. 커다란 피자 조각 모양 튜브 위에 같이 있었는데.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작은 햄이 올라가 있던 튜브도, 앞머리가 이마에 창살처럼 붙어 있던 예나도 보이지 않았다. 눈 앞으로 돌이 무리지어 굴러갔다. 바람 소리에 맞춰 나무들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물살을 북돋우고 있었다. 굴러가던 돌맹이에 왼쪽 버튼이 눌렸다. ‘구름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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