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는 사라진 게 분명했다. 손에 쥐고 있던 밀짚모자를 벗어 방바닥에 내던졌다. 창밖은 잔뜩 갈기를 세운 바람이 전신주에 영역표시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주 흐리댔는데, 날이 궂어서 집에만 있으랬는데. 지구 전체가 젖어들고 있었다. 타닥타닥 창문을 두드린 빗방울이 내 허전한 마음 안쪽으로 굴러내렸다. 예나가 행복하기는 했을까. 나는 좀 겁이 났고, 틀어놓...
미마가 달릴 때마다 총알 같은 빗방울이 쏘아졌다. 모래로 무장한 빗방울이 바닥을 굴렀다. 미마의 하얀 양말을 적시고, 내 온몸을 적셨다. 미마는 검어지지만 나는 더 검어질 곳이 없다. 미마의 발뒷꿈치를 부여잡았다. 할 수 없는 말들이 거머리처럼 꾸물거렸다. 동그랗게 말린 파도가 세모처럼 부서졌다. 쏴아, 하는 소리가 미마와 나를 감싸안았다. 미마는 파도 앞...
금붕어가 사라졌다. 아무도 없는 아파트 복도에서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고개를 숙여 어항이 올려져 있던 서랍장을 둘러 보았다. ‘키울 사람 키우시오’ 라고 적혀 있던 종이도 사라져 있었다. 나는 물고기 밥을 손 안에서 굴렸다. 손에 땀이 배어 금새 진득해졌다. 물기를 머금은 물고기 밥을 서랍장 옆에 있는 화분에 뿌렸다. 아파트 복도 난간 밖으로는 비가 오...
우리, 이제 친구로 지내자. 나의 표면에 닿은 원의 손끝은 거칠었다. 나는 화장대 모서리 쪽에 시선을 붙이고 원을 올려다 보았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일방적인 나의 원. 원은 눈 앞머리에 고여 있던 눈물을 훔치고 립스틱을 쥐어들었다. 너는 매일 나를 보려고 화장대에 앉아 있잖아. 원이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양파가 기어들어왔다. 토인지 뭔지, 주황색 액체를 가득 묻히고서. 양파가 가출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양파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경찰관에게 몸을 기댔다. 경찰관의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미간 사이에 잡힌 주름이 보였다. 토마토처럼 얼굴이 빨간 양파를 보니 콧김이 세게 나왔다. 양파의 눈이 감겼다. 가만히 서 있으면서도 발이 꼬였다. 양파가 죄가 ...
저기 봐, 저게 오륙도야. 놀이터 건너편에 바다가 있었다. 파도가 솟아난 바위에 부딪혔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우리도 이런 데 살면 좋겠지, 하면서. 목에 두른 손수건의 택이 피부를 긁었다. 공중에서 흔들리는 오른손으로 손수건을 빼내려 했다. 엄마는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며 더 단단하게 매듭을 지었다. 아, 좀. 하는 말이 목젖을 감쌌다. 입 ...
라이거가 또 세상을 구했습니다. 거리는 어둑했다. 휴대폰 화면에는 라이거를 목격한 사람들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라이거는 세상을 몇 번이나 살린 히어로. 증거 영상 속에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고 있었다. 괴한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아이가 눈물에 절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아직 초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아서 너무 무서웠어요. 꼼짝없이 죽겠구나, 하는 ...
천장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쏴-하고 물을 내뿜는 기계음 사이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기서 나가야 해. 벽면이 고르지 않았고, 피할 틈도 없이 쏟아지는 물은 차가웠다. 매주 한 번씩 있는 일이었다. 물이 나오는 틈을 바라보다 눈길을 돌렸다. 누가 새로 왔나, 하고. 처음 이곳에 왔던 날에는 나도 저랬지. 눈이 마주쳤다. 한여름의 장마처럼 물이 쏟아졌다. ...
뒷집에는 코끼리가 산다. 볼링 핀 두 개가 허공을 떠돌았다. 비명 소리가 들렸다. 볼링 핀은 연습 단장의 두 손을 번갈아가며 날아다녔다. 지루하다고 생각했지. 매일같이 보는 광경이었다. 팔을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에 인공 털이 쓸렸다. 폭신하고 윤기가 없는 게 따끔하기도 했다. 볼링 핀이 손에 닿기 직전. 긴장감이 온몸을 감싸안았다. 나는 사람이지만 동물. ...
눈을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번호표를 붙인 사람들이 쏜살같이 내 옆을 지나갔다.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봤다. 물소 무리 같은 사람들이 가쁜 숨을 합창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고개를 내렸다. 뛰쳐나올 것 같은 심장을 번호표가 막고 있었다. 몇 달만에 돌아온 내 신체인데, 내 것이 아닌 것처...
우미야,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지만 네 생각이 더 다급해 일어서지 않는다. 우미야. 나는 요즘 여러번 얼었다 녹았다 한다. 끊임없이 살아야지, 싶다가도 풀이 죽어 버린다. 그래서 내가 끈끈하지 못한가 보다. 끈덕지게 삶에 붙어 있지 못하나 보다. 햇빛도 야금야금 잘 삼키고, 물도 꿀꺽 잘 마셔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서 그런가 보다, 우미야. 녹는 점과 어...
체온에 놀라 눈을 떴다. 거친 감촉. 여자의 안경에 내 모습이 비쳤다. 동그랗고 빨갛다. 스파이처럼 초록색이 끼워져 있다. 나는 늘 누군가를 올려다 보았지만 이런 각도와 대우는 처음이다. 초면인데 과도를 들이미는, 과일과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렇게 작은데도 날카롭고 뾰족한 과도가 신기했다. 위험한 건 다 큰 줄 알았다. 여자는 공기가 빠진 것처럼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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